동아일보
《동아일보》(東亞日報, Dong-A Ilbo)는 신문 발행 업체인 동아일보사가 발행하는 대한민국의 일간 신문이다.
역사
창간
동아일보 창간호
동아일보 사옥 내부에 전시되어 있는 인촌 김성수 동상.
창간 초기
구 동아일보 사옥 (the Old Dong-A Ilbo Company Office)
1919년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이른바 문화 통치의 일환으로 이듬해 1월 3개의 한국인 민간신문 발행을 허가하였는데 이 중 하나가 동아일보이다. 동아일보는 1920년 4월 1일, 김성수를 비롯한 박영효, 김홍조, 장덕준 등을 중심으로 타블로이드판 4면 체제로 발간되었다. 당초 3.1 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창간하려 하였으나 부족한 자금을 마련하느라 한 달이 늦어졌다. 창간 당시 구독료는 3전(지금의 약 900원)이었으며, 사옥은 서울 종로구 화동 138번지 한옥건물이었다. 설립자 김성수와 초대 사장 박영효를 비롯한 창간 주도 인사들은 '민족주의(民族主義)', '민주주의(民主主義)', '문화주의(文化主義)'를 사시(社是)로 내걸었으며 이 3대 정신은 오늘날까지 동아일보의 핵심가치로 내려오고 있다.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강제정간의 압력을 당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초반 조선총독부의 무단 통치를 비난한 기사는 수시로 문제가 되어 신문과 윤전기(인쇄기)가 압수되는 수난을 여러 번 겪기도 했다. 1920년 9월 25일 일본 3종 신기를 비판한 9월 24일과 9월 25일의 기사 내용이 문제시되어 제1차 무기정간 처분을 당한다. 이후 4차 무기정간 처분을 당하고 여러 번 윤전기와 발행 신문이 압수당하는 등의 일을 겪기도 했다. 이어 1920년 1월 10일에 정간이 해제되고 2월 21일부터 다시 발행한다.
1923년 6월 이후 산사에서 벌인 충청북도도지사 박중양의 휴양, 유흥행위를 집중 보도, 비판하기도 했다. 1923년부터 박중양은 보은군 속리산 법주사에 휴양을 다녀온 뒤 계속 자신의 사적인 휴양지, 유흥지로 남용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동아일보가 이를 꾸준히 비난하고 기사화하여 비난하면서 일각에서 동아일보에 압력을 행사하려 하자 이때 윤치호가 나서서 조선총독부 당국에 설득하여 사실대로 보도한 민족의 정론인 동아일보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며 적극 비호하기도 하였다.
민족운동
창간 이래 동아일보는 한민족의 3.1 정신을 이어가고자 각종 민족운동에 앞장서왔다고 주장한다. 1920년대의 국산품 애용 운동, 언론집회압박 탄핵운동, 민립대학설립운동 등 국내 대중적 민족운동과 민중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보도하였다.
1931년 7월,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을 목표로 하는 브나로드 운동을 일제가 금하기 전까지 4년간 전국적으로 활발히 전개하였고, 문학작품 공모(1925)를 통한 근대문학 계발에도 힘썼다. 1933년 4월에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새로운 철자법을 채택하는 등 여러 사업을 통해 민족정신을 강화하고 민중 계몽에 열중했다고 동아일보 스스로 주장한다.
1926년 3월 7일 국제농민본부에서 '조선농민에게' 보낸 3·1 만세운동 기념 기사들을 게재하였다가 제2차 무기정간 처분을 받았다. 동시에 이때 동아일보 주필이자 3.1 운동에 가담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인 송진우와 발행인 김철중 등에 각각 징역 6월, 4월 실형이 언도되기도 했다. 그 뒤 항소로 취소되면서 4월 21일 다시 속간했다고 동아일보 측에서 주장한다.
여성 지위 향상 운동
동아일보는 창간 초기부터 식민지 조선사회의 인습에 얽매여 집안에 갇혀 있던 여성을 일깨우고자 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여성'면을 고정으로 두고 '신여성과 교육', '여성해방과 대가족제도', '여성과 직업' 등 여성의 권익 향상과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기획기사와 기고를 실었다.
또한 1933년 1월 일간 신문사로서는 최초로 여성 월간지 '신가정'('여성동아'의 전신)을 창간했다. '신가정'은 여성 독자를 고려해 제목만 국한문을 섞어 쓰고, 그 외 모든 기사는 순 한글로 제작했다. 신가정은 여성지라는 특징을 살려 요리, 편물, 염색 등에 관한 각종 강습회를 열었다. 또한 부인 밤 줍기 대회, 주부 야유회, 부인 고궁순례단 등 다양한 이벤트를 열어 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주부들의 숨통을 열어 주었다.
동아일보는 계몽활동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를 열어 여성들의 사회적인 참여를 유도하였다. 1923년 열린 최초의 전국여자정구대회는 여성의 권리 신장과 기회균등을 주장하기 위해서 열린 대회였다. 지금도 전국여자정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이어지는 이 대회는 동아일보가 주최한 가장 오래된 사업이자 국내 스포츠를 통틀어 최장수 대회이기도 하다. 첫 대회가 열릴 당시는 유교적 전통이 굳어져 있었기에 이 대회는 단순한 스포츠의 차원을 넘어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한 사회적 캠페인이었다. 이 외에도 1925년 3월 조선 최초로 여성들의 공개적인 등장의 발판을 마련한 ‘전조선여자웅변대회’가 열리기도 했다.
브나로드운동
1928년 4월부터는 특집 기사를 내어 문맹 퇴치 운동을 제창하였으나, 반일감정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조선총독부의 검열과 금지로 중단되었고, 3년 만인 1931년부터 브나로드운동을 적극 홍보, 보도함으로써 문맹 퇴치 운동을 다시 전개한다.
브나로드(Vnarod)란 러시아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동아일보는 1931년 7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이 심훈의 대표소설 상록수의 주요 내용이 되기도 했다. 브나로드운동에 대한 적극적인 보도와 홍보는 의식 있는 청년층으로 하여금 브나로드운동, 농촌 계몽 활동, 문맹 퇴치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무기정간과 폐간
제2대 사주를 역임한 인촌 김성수는 총독부의 창씨개명 요구를 끝내 거부했고, 창씨개명 아이디어를 낸 총독부 학무국장이 직접 창씨개명을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1940년 8월 강제 폐간될 때까지 20년 동안 조선총독부로부터 정간 4회, 발매금지처분 2000회 이상을 받았고, 신문 전체가 압수되는 압수처분 89회와 기사삭제 연 2423회 등 제재를 당하는 고초를 겪었다.
1939년 9월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민족의 황국신민화를 내세워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했고, 동아일보는 1940년 8월 강제폐간되었다. 이때까지 총 4차례의 무기정간을 당했고, 그밖에 수 차례의 검열과 압수 삭제 등의 수모를 겪기도 했다.
1936년 8월 25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일장기 말소 사건'
1936년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의 사진을 동아일보 기자 이길용이 주도하여 1936년 8월 25일 자에 게재하면서 가슴 부분의 일장기를 지워버려 정간당한 일장기 말소 사건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이는 여운형의 조선중앙일보의 기사에서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싣고 그 기사의 사진을 동아일보에서 그대로 기사에 올렸을 뿐 동아일보가 손기정 선수의 유니폼에서 일장기를 말소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은 동아일보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며, 사실과 다르다.
동아일보는 창간 이후 1920년~1929년 9년간 280일간의 정간처분을 받았고 300회의 차압과 판매금지처분을 당하였으며 수시로 경고, 견책을 당하였다. 송진우, 장덕수는 거의 매일같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출두하여 차압된 기사가 어디가 나쁘냐고 항의하고 논쟁하고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나 1941년 폐간 직전에 점점 친일 노선으로 변해갔다.
광복 이후
1975년 1월 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로 텅 빈 광고란이 실린 자사 신문을 보는 동아일보 기자
폐간 이후 5년 4개월이 지나고, 광복 3개월 반 만인 1945년 12월 1일 복간되었다. 1945년 12월에 열렸던 모스크바 3상 회의 내용 중 '신탁통치' 문제를 놓고 사전에 오보를 내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 동아일보는 창업주 김성수의 영향으로 한국민주당의 대표적인 언론 기관지이기도 하였다. 1955년 3월 신문의 오식(誤植, 틀린 글자)이 문제가 되어 정간당하기도 하였다. 5.16 군사정변으로 등장한 군사독재 세력은 사전검열을 없앤 대신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만들어 사실상 기자의 취재와 보도를 극도로 제한하여, 언론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였다. 또한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은 당시 조·석간제로 운영되던 신문 발행 체제를 단간 제로 바꿀 것을 강요하여, 동아일보는 석간제로 바꾸어 간행하였다.
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한 유신독재정권의 언론탄압이 심해지고, 1973년에 김대중 납치사건과 관련해 요미우리 신문이 비난하자 동아일보 기자들은 1974년 10월 24일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투쟁에 나섰다. 그러자 유신정권은 동아일보 광고주들에 압력을 넣어 무더기로 광고를 해약시켰다.(동아일보 백지광고 사태) 점점 동아일보사의 경영이 어려워지자 독자들은 유신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의미로 자신의 돈을 들여서 광고 해약으로 비어있는 광고면에 백지광고를 내기도 했다.
그러나 1975년 3월 12일, 경영진은 결국 정부에 굴복하였고, 유신정권을 비판하던 기자들을 해고하였다. 기자들은 사옥에서 농성에 나섰으나 3월 17일 내쫓겼다. 이후 동아일보는 친정부적 성향으로 돌아서게 되며, 해직된 기자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만들어 민주화 투쟁을 벌였다. 그 후 그들은 창간위원회에 가입하여 1988년에 '한겨레'를 출범시켰다. 1990년대에 들어서 증면 경쟁이 크게 늘어나고, 1993년 4월 1일 석간에서 조간화 체제로 바꾸었고, 조간화 단행 6개월 만에 발행부수 200만 부를 기록하였다. 1998년 1월부터 신문 전면에 가로 쓰기를 시행했다. 2011년에는 동아방송의 후신으로 종합편성채널 채널A를 개국했다. 2020년 동아일보 창간 100주년을 맞이했다.
-ko.wikipedia.org- 20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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