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이모저모 시사상식

제주 4·3 사건 . 부여 부소산성 .

by 안전제일무사고 2023. 4. 13.
반응형

▲ 제30회 대산문학상에 시인 나희덕·소설가 한강 ▲


제30회 대산문학상 수상자로 한강(소설), 나희덕(시), 한기욱(평론), 한국화·사미 랑제라에르(번역)가 각각 선정됐다. 한강 작가는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나희덕 시인은 「가능주의자」, 한기욱 평론가는 「문학의 열린 길」, 한국화·사미 랑제라에르 번역가는 황정음의 「백의 그림자」(Cent ombres)로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심사위원들은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가 광주와 제주 4·3사건을 잇고 뒤섞으며 지금 이곳의 삶에 내재하는 그 선혈의 시간을 온몸으로 애도하고 ‘작별하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시집 「가능주의자」는 반딧불이처럼 깜빡이며 가닿아도 좋을 빛과 어둠에 대해, 현실 너머를 사유하는 결연한 목소리로 들려준 점을 높이 평가했다. 평론집 「문학의 열린 길」은 동시대 문학 공간과 문제적 문학에 대한 치열한 비평적 대화를 끈질기게 추구한 점을 선정 이유로 들었다.

프랑스어로 번역돼 현지 베르디에 출판사에 출간된 「백의 그림자」는 원문에 얽매이기보다 작가 특유의 울림과 정서가 외국 독자에게도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가독성을 높여 문학성을 살린 점을 인정했다.

대산문학상은 대산문화재단(이사장 신창재)이 운영하는 국내 최대 종합문학상이다. 희곡과 평론 부문은 격년제 심사를 해 올해는 평론 부문 수상자를 발표했다. 수상자에게는 각 5000만 원씩, 총 2억 원의 상금을 준다. 양화선 조각가의 청동 조각 ‘소나무’ 상패도 수여된다.

■ 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민간인이 대량 학살된 사건이다. 제국주의 일본 패망 이후 남북한의 이념 갈등을 발단으로 남로당 무장대가 봉기하며 미군정·국군·경찰과 충돌했고 극우파 민간 무장단체들의 폭력사태를 이승만 정권과 미국 정부가 묵인하면서 민간 학살이 발생했다. 1만 4028명이 희생됐고 2만 8561명의 유족을 남겼으며 피해 규모와 진상 규명이 아직도 진행되고 있다.

반응형


▲ 백제 ‘왕궁급 건물’ 추정 건물지 2동 부여서 발견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부여 부소산성 군창지 주변 시·발굴조사에서 백제 사비기 대형 와적기단[瓦積基壇 : 기와를 쌓아 만든 기단(집터 위에 한층 높게 쌓은 단)] 건물지 2동을 확인했다고 11월 7일 밝혔다.

부여 부소산성은 백제 사비도성의 북쪽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는 산성으로 사비 도읍기 왕성,, 후원, 배후산성 등의 역할을 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981년부터 2002년까지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과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당시 조사에서는 백제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성벽과 성내시설물(주거지, 저장구덩이, 우물지 등)이 확인된 바 있다.

이번 조사는 향후 중·장기적으로 진행될 부소산성의 성내 평탄지 핵심 건물군을 확인하기 위한 사전조사다. 부소산성 남동쪽의 군창지부터 남서쪽의 반월루 주변까지 평찬지 전체 지역에 대한 조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추진됐다.

와적기단 건물지는 백제의 대표 사찰 유적인 정림사지, 왕흥사지, 군수리사지 등에서 주로 확인된다. 사비기 후기 왕궁지로 거론되는 부여 관북리 유적, 익산 왕궁리 유적 등 백제 왕도의 핵심 유적에서 주로 확인된 건물지 형태다.

특히 이번에 조사된 부소산성의 와적기단 건물지는 동서길이가 각각 16m 이상인 북쪽 건물과 14m 이상인 남쪽 건물지 두 동이 평행하게 배치된 것을 확인했다. 또한 기단이 최대 20단 가까이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돼 지금까지 알려진 와적기단 건물지의 기단이 평균 5~6단 남아있는것과 비교하면 수평으로 쌓은 와적기단 중 가장 잘 보존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부소산성 군창지 일대는 1993년 조사에서 ‘대당(大唐)’명 와당, 중국제 자기 등 중요 유물이 출토됐다. 이번 조사에서 대형 와적기단 건물지가 일정 배치를 가지는 점, 와적기단을 다른 재료를 거의 섞지 않고 정선된 기와로 축조한 점 등을 고려할 때 백제 왕궁급 건물의 모습을 추론해 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 부여 부소산성(夫餘扶蘇山城)
부여 부소산성은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백제의 도성이다. 웅진에서 사비로 수도를 옮기던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보호하기 위해 이중(二重)의 성벽을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정상부를 테처럼 둘러서 쌓은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 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바꾼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사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삼국시대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방어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던 곳으로써 역사적 의미가 있다.

-애드윌 시사상식 2022.12-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