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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 바로세우자

이승만의 논란과 의혹

by 안전제일무사고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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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정부 수립 정당성 논란

해방정국에서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이 한국의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주장과 공산주의에 맞서서 자유민주주의 반공국가를 건설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독재자 여부 논란

허정에 의하면 '우리가 독재라고 부르는 그의 행동이 얼마나 엉성하고, 어설프고, 불철저했던가. 만일 그가 스스로 독재자가 되려고 결심했다면 그는 이렇게 불철저한 행동을 하지 않았으리라고 믿는다. 독재자는 우남과는 다른 유형임을 이제 국민들은 이해해야 할 것이다. 심신이 쇠약한 노령에 이르러 행정수반으로서의 과오와 실정을 저지른 바 없지 않지만 그가 평소에 쌓은 공적과 대비하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 독재를 했기에 독재자라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윤치영은 이승만이 평소 '부정과 부패를 싫어하고 자유민주주의적 공명선거를 믿고 있었다며 이승만 몰래 자유당 측근들이 부정을 저지른 사실이 사후에 다른 사람에 의해 보고되자 깜짝 놀라, 그렇다면 학생과 국민이 일어선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며 자진해서 하야한 이박사였다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진상이 드러나자 '드디어 이승만은 4월 27일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보여주었다.'라며 이승만이 독재자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는 1970년대부터 이승만이 독재자라는 주장은 낭설이며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설명, 이승만이 3선으로 퇴진하려 했으나, 이승만을 등에 업고 권력을 행사하려는 자유당 측근들의 간계로 관제 3선 출마 시위가 있었고, 이승만은 속은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역설했다. 1979년 이후부터는 공공연히 이승만의 3선 퇴진설과 우의마의라는 단어의 어원을 역설하며 학생 운동권의 이승만 독재자설에 반론을 제기했다.

 

이원순은 '학생들의 4.19 의거가 한창일 때 그는 대통령 직위를 미련 없이 버렸다. 이런 것을 보면 그는 별로 명예욕이 강한 인물은 아닌 것 같이도 생각된다.'라고 주장했다.

 

최기일은 이승만이 말년에 잘못된 측근들이 눈과 귀를 가려서 오도했다고 보았다. 최기일은 박정희를 한국 최초의 성공한 쿠테타이자, 한국 최초의 독재자로 보았다.

 

측근들의 부패와 오도

 

측근들이 그의 눈과 귀를 가렸다는 설도 있다. 이승만이 돈암장이화장에 있을 때부터 비서관이며 그의 비서실장을 지낸 윤치영은 이기붕의 수하들이 눈과 귀를 가리고 이박사를 속였다고 진술했다윤치영은 '가슴아픈 것은 면종복배판 측근들에 대한 이박사의 심정이었다. '는 것이다. 하지만 측근을 잘 못 기용했다면, 그 책임 역시 임면권자인 대통령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윤치영은 제1공화국 기간 중의 부패와 선거 관련 문제는 이승만과는 무관하다고 확신했다. '얼마간의 무리도 따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0년대 들어 저질러진 그러한 행태들은 자유당 정권의 부패한 세력들에 의해 주도된 것이다. 가령 이기붕박마리아 같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더욱 유지시키고 심지어는 대권을 생각해서 저지른 짓들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윤치영은 내무장관 최인규와 자유당 간부들이 부정선거를 획책했다고 하였다. 윤치영에 의하면 '선거전이 종반으로 접어들면서 내무장관 최인규가 진두지휘하는 행정부의 부정선거 음모는 자유당 수뇌들과 미리 짜여진 각본에 따라 실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행정관서와 경찰이 청중을 강제동원하는 전국 유세가 2월 27일 대구에 이르러 수성천변에는 역사상 초유의 군중이 자유당 집계로도 30만에 달하였다. '며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에는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을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장면 후보의 집회를 방해할 목적으로 등교케 했다.

 

'최인규가 각급 행정관서와 경찰, 그리고 지방선거관리위원회에 내린 비밀지령은 이기붕 후보를 필사적으로 당선시키려고 무리를 담고 있었다'며 윤치영은 '이러한 부정선거운동의 양상을 보며 더군다나 장막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모른 채 당신의 평소의 소신과 철학대로 민주주의적인 절차가 잘 진행되고 있으려니 하고 믿고 있을 이승만 박사의 처지가 가엾고 통분할 노릇이었다. '고 했다. 윤치영은 노쇠한 이승만 대통령의 여생을 점치던 정상배와 협잡꾼들과 같은 기회주의자마저 끼어들어 벌써부터 논공행상에 여념이 없는 작태들을 노정시키고 있었다 허정 역시 이승만이 소인배들의 농간에 희생되었다 고 하였다.

 

장면은 이승만 측근들이 장기집권을 위해 부정부패를 저질렀다고 비판했다. 장기집권은 이승만의 뜻이 아니라 그 부하들의 농간이었다는 것이다. '그 분을 장기집권 시키기 위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중석불 사건, 원면 사건, 연계 자금 사건, 산업 금융 채권 사건 등 추잡한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 국민의 불신을 사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인의 장막에 가려져 있음을 은연중에 인식했다고 한다. 윤치영에 의하면 1958년 이승만을 찾아갔을 때 '당신의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는 가운데 뭔가를 암시하는 듯 '철창에 갇힌 호랑이'에 비유해서 혼잣말처럼 독백하시던 일로 미루어 나로서는 여러 가지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며 이승만이 뒤늦게 자신이 부하들의 농간에 놀아남을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진보당 사건 논란

정적 조봉암을 숙청하기 위해 진보당 사건을 조작해 사법살인을 일으켰다는 비판이 있었다. 그러나 2020년 러시아 연방 국가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구소련 외교문서가 발견되면서 이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조봉암은 북한과 내통하던 간첩이자, 진보당은 소련 내지는 북한의 지시를 받는 소위 괴뢰정당이며, 김일성은 조봉암의 대선 출마에 관여했으며, 북한은 조봉암에게 대선자금을 지원했다. 이 구소련 외교문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2011년 대법원의 재심 무죄 판결도 다시 들여다 봐야할 것으로 보인다.

동상 건립 논란

 
배재중,고등학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

 

1949년 3월 26일 중앙청 광장에서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9시에 기념식이 열렸고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었다. 1954년 9월 18일 교통부 광장에서 '철도창설 55주년 기념 이승만 대통령 흉상 제막식'이 열렸다.

 

1956년 3월 31일 서울 탑골 공원에 이승만 동상이 설치되었다. 이승만의 8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24m 높이의 동상이 제작되었다. 1956년 8월 15일 이 동상의 제막식에서 이승만에 대한 만세 삼창이 이루어지고 서울 하늘에서는 축하 불꽃 놀이가 벌어졌다. 하지만 이 동상은 4.19 혁명 이후 국무회의 의결을 거쳐 철거되었다. 1959년 10월 이승만의 얼굴을 넣은 100환 동전 등 이승만을 소재로 한 화폐 8종이 발행되었다.

 

서울 뚝섬의 '우남송덕관', '우민회관', '우남정' 등 이승만의 호 '우남'이 들어가는 건물이 건축되었다.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명칭이 변경되고 중앙대 도서관도 '우남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승만 하야 이후 이러한 기념물,건물등은 철거되거나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1년 8월 25일 서울특별시 장충동 자유총연맹 광장에 이승만 동상이 51년만에 건립되었다. 이에 한국자유총연맹 정문 앞 인도에서 사월혁명회·한국전쟁유족회 등 단체들은 동상 제막식 반대 집회를 열었다.

미국의 이승만 제거 음모설

3.15 부정선거 자체를 이승만을 제거하기 위한 미국의 계략이라는 주장도 있다. 윤치영은 이박사의 빛나는 독립투쟁의 업적을 이 기회에 일거에 실추시키고 어부지리를 얻으려 하고 있다는 모측의 계획된 공작이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미국 국무성의 음모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3.15 부정선거 규탄 데모로부터 변질되어 이승만 박사를 기꺼이 하야하도록 만든 일관된 계략이 있었다고 의혹을 제기하였다. 윤치영은 '미 국무성의 이승만 제거작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나 안다고 해도 지금에 와서 그 진상을 자세히 밝힌다는 것은 쉽고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싶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윤치영은 1950년대부터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려고 공작을 하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파리 강화회담 당시 일본 국적 표기 논란

1918년 10월을 기준으로 한 징집서류에 이승만이 본인의 국적을 'Japan'으로 자필서명한 사실이 미국 국가기록원과 고문서보관 사이트 엔시스트리닷컴이 공개한 자료에서 발견됐다. 

 

이에 이승만이 1919년 초 대한인국민회의 특사로서 파리 강화회담에 참가하기로 했는데 이때 미국으로부터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일본 국적의 서류를 한 개 만든 것이었다.

-ko.wikipedia.org- 202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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