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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 바로세우자

이승만의 평가

by 안전제일무사고 2023. 4.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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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평가

독립운동가

장면"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 할 만큼 위대했다"라고 평가하였다.

 

허정은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4.19의 노도가 장안을 휩쓸었을 때 비로소 민의의 소재를 정확히 파악한 그는 '부정을 보고서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것이라며 깨끗이 권부에서 물러났다.' '젊은 학생들의 애국 기상을 가상히 여기고 국민이 원한다면 사퇴하겠다면서 자진해서 대통령직을 내던지고 하야함은 이승만이 아니고서는 하지 못할 결단이었다.'라고 평하였다. 

 

'우리는 그의 마지막 모습만을 보고 그의 전부를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남한 단독정부 수립으로 한반도 전체의 적화를 막은 그의 슬기와 용단 만으로도 우남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농지개혁법 시행

농지개혁법은 일제강점기의 봉건적인 지주-소작인 관계의 사회를 자작농-자유인의 사회로 바꾸는 혁명적인 계기로 평가된다. 산업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로막는 낡은 요소는 사라지고 지주 대신 자본가가 새로운 경제의 주역으로 급성장하였다. 자기 땅을 일구게 된 농가에서는 높은 교육 수준을 갖춘 미래의 노동자들이 배출됐다. 또한 6.25 전쟁 중 남한에 공산주의가 스며드는 것을 방지하였다. '토지개혁, 을 통해 주인의식이 생긴 농민들이 많아져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 박헌영 등이 주장하던 '100만 봉기설'이 무용지물이 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김일영 교수는 "농지를 받은 농민은 이승만의 지지기반이면서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구성원으로 포섭되었다”“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정체성을 만든 첫째 계기가 농지개혁"이라고 주장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된 소작농들은 한국전쟁 동안 북한의 선전 공세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충실히 남을 수 있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020년 기준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성공작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제2의 한국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약의 가장 큰 목적인 전쟁 방지를 이뤄낸 것이다. 여기에 국방 역량을 미군이 부담하여 대한민국은 경제개발에 그만큼 힘을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의도 존재한다.

 

즉, 산업화를 바탕으로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하여 이후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하게 만든 보이지 않는 공신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안보적 위기가 높은 국가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GDP 대비 국방비 지출은 3% 미만으로 세계 평균과 그리 차이 나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매년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예산절감 효과를 내고 있다. 또한 항시 전쟁 재발의 위험이 존재하는 한반도에 '미국이 전쟁을 막아준다.'라는 안정감을 제공함으로써 일명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억제하여 해외 투자자금의 안정적 유치에 크게 기여해 왔다.

 

역으로 북한 입장에서는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근원이라 볼 수 있다. 휴전 당시 그리고 지금까지도 명실상부한 세계 최강국의 군사적 보호를 담보하여 북한 수뇌부의 침략 의지를 무력화시켰다. 그래서 북한 정권과 종북주의자들이 빼놓지 않고 외치는 요구사항 중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폐기'가 있는 것이다.

대통령 직접선거제 도입

비록 발췌개헌안을 통과시키는 과정에 무리가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국민의 손으로 국민의 대표를 선출하는 대통령 직선제를 최초로 마련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지난 총선에서 야당이 다수당이 되어 간선제하에서 직선제로의 개헌은 임기연장의 수단으로 볼 수 도 있는 부분이 있어 이를 긍정적 평가로 보기에는 어렵다.

 

1952년 7월 4일 몇몇 발췌개헌안 반대 의원들이 국회 불출석을 선언한 가운데, 군경들은 무력충돌에 대비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였다. 국회의원 총 210석 중 166명이 출석한 가운데 기립투표 결과 찬성 163표, 반대 0표,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이 통과되었고, 7월 7일 공포하였다.

자유민주주의자

1991년의 한국논단과의 인터뷰에서 윤치영'우리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박사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그분은 평생을 독립투쟁에 몸바쳐 온 분이고, 민주주의를 가장 신봉하는 인물이었다. '라고 평하였다.

 

Students for Liberty(SFL: 자유를 위한 학생들) 한국지부 전계운 대표는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주의를 품으며 자유민주제도를 통한 대한민국의 번영을 꿈꾸었다고 평했다. 민족주의가 한국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자유주의의 핵심 가치인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함으로써 눈부신 번영을 이루어 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부연 설명을 그 평가 다음에 덧붙였다.

문맹 퇴치와 초등 의무교육 도입

문맹을 퇴치하고 국민학교 의무교육을 실시했다는 점에 있어서 한국 근현대 교육사에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있다.

 

1954년부터 문해교육 정책, 문맹퇴치 5개년 사업 등을 진행하여 문맹률을 1945년 78%에서 1958년 4.1%로 급감시켰다. 1954년부터 취학률을 70% 수준에서 95%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초등 의무교육완성 6개년계획’을 실시하고 교육예산 약 80%를 의무교육비에 배정할 정도로 주력했다. 총 학령아동의 취학률은 1957년 90%를 넘겼고, 1959년에는 96% 목표를 달성하였다.

어학 능력

미국에서 오래 체류한 탓에, 비교적 영어를 능통하게 구사했다. 그는 영어를 제1언어처럼 사용했으며, 심지어 영어로 연설문을 써서 한국어로 번역을 시켰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그는 약간의 독일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부부간에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오스트리아의 언어인 독일어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한다.

개신교 보급

역사학자 이주영은 그를 윤치호와 함께 지난 1세기 동안 한국의 역사에서 개신교와 문명개화의 연결 고리가 가장 확실하게 드러난 대표적 인물로 평가했다. 이주영은 이승만에 대해서 “이승만 전 대통령은 통치 기간에 모두 135명의 장관과 장관급 부서장을 임명했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인은 절반에 가까운 47.7%였다. 그리고 군대와 감옥에 기독교를 보급하기 위해 군목제도와 형목제도를 도입했다”라고 말했다. 또 사회 전반의 미성숙으로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개인의 평등을 전제로 하는 자유선거제도의 확립에도 많은 노력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부정적 평가

친일파 등용에 대한 비판

제주 4.3 사건여순사건, 반민특위 습격사건, 장면 부통령 암살 미수 사건 등의 배후에는 친일 경찰이 있었다고 한다. 노덕술, 이구범, 최운하 등은 일제강점기부터 고문을 잘해서 출세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반공'을 이용해 국민들에게 공포를 심었다. 당시에는 친일행위 청산을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기 쉬웠다고 한다. 이승만도 친일파청산 주장은 공산당의 연관성이 긴밀하다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

 

역사학자 한영우는 "이러한 이승만의 친일파 포용은 민족문화의 정상적 발전을 저해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남게 되었다"라고 평가하였다.

각종 민간인 피해의 책임

비판론자들은 제주4.3사건여순사건 진압 과정에서 발생된 대규모 민간인 피해에 대해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또한 6.25 전쟁 시기 한강 인도교 폭파보도연맹 학살국민방위군 사건거창 양민 학살 사건으로 인한 민간인 피해 등에도 대통령 이승만의 책임을 제기한다.

 

1960년 4.19 혁명에서는 어린 초등학생들만으로 구성된 열도 여러 개 만들어져서 시위대 언니 오빠들에게 총을 쏘지 말라며 시가행진을 하는 행렬에 동참하여 행진을 하였고, 그런 초등학생들에게도 시위 진압 경찰들이 발포를 하여서 다수의 초등학생들도 이승만의 관사 경무대 앞에서 사망하였다.

국가 보안법 남용

1948년 여순사건이 발발하는 과정에서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명분으로 이른바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문제는 이것이 일제시대 독립투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었던 그 악명 높은 치안유지법을 모태로 했다는 사실이다.

 

1949년 이승만이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들어진 반민특위를 해체하려고 했을 때, 국가보안법 제정에 극렬 반대했던 노일환 의원 등 반대파 소장의원 13명을 이 국가 보안법을 통해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구속했으며, 1949년 한 해 동안 국가보안법으로 잡아 가둔 사람의 숫자가 12만 명이 넘었다.

장기집권을 위한 개헌이라는 비판

1954년 제2차 개헌의 의도가 국익보다는 이승만과 자유당의 사리사욕에 있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개헌안의 표결 결과에 대한 국회의장 또는 사회자의 의사 표시가 취소 또는 번복되려면 먼저 타당한 법적 근거가 갖추어져 있어야 하고 또 그 근거에 따라 절차대로 진행돼야 하는데, 자유당은 그런 근거와 절차가 없었던 당시 법의 허점을 이용해 즉석에서 표결을 번복하였다(의결정족수 135.33석을 135석으로 사사오입 적용). 이에 따라 제2차 개헌은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부정선거의 책임

1958년 1월 1일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을 통과시켰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은 위헌 시비가 있었으나 민주당이 이를 묵인함으로써 통과되었다. 협상선거법의 언론 규제 조항 삽입은 자유당이 본격적으로 부정선거를 기획할 수 있도록 기초를 제공했으며, 언론과 국민의 기본권이 규제를 당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자유당과 민주당은 협상선거법에 따라 실시된 제4대 민의원의원 선거에서 의도한 대로 압도적 의석을 차지했고, 무소속과 군소정당은 크게 타격을 입었다. 이후 자유당은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으며 이에 대해 대통령인 이승만의 도의적 책임이 있고 실제로 하야하였다.

언론탄압에 대한 비판

1955년 '동아일보 괴뢰 오식 사건'과 '대구매일신문 피습 사건', 1958년 '경무대 똥통 사건'과 '함석헌 필화사건', 1959년 '경향신문 폐간 사건' 등, 일련의 사건을 일으켜 언론을 탄압한 것에 대한 비판을 받는다.

 

 

외교력 평가

대미국 관계

이승만은 미국을 불신하면서도 강력한 동맹상대로 미국을 지목하였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에 밀사로 파견되었을 때 미국이 일본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1905년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대한국 정책에 대한 강력한 불신을 품어왔다.

 

미국은 비밀리에 대통령 루스벨트가 파견한 윌리엄 태프트 국무장관과 일본 총리 가쓰라가 비밀 회담으로 일본이 한국 점령을 용인하는 대신 미국은 필리핀을 점령하는 것을 일본이 침해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1940년대에도 임시정부 승인을 미루거나 회피하는 미국에 대한 이승만의 불신은 계속되었고, 한국 전쟁의 원인도 1949년 주한미군이 철수하는 것이 원인을 제공한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대일본 관계

일본에 대한 외교정책은 시종일관 반일노선과 경계를 지향하였다. 그러나 일본에 대표부를 파견하여 연락을 유지하였고, 이는 이승만 퇴진 후 주일한국대사관으로 승격되었다. 6.25 전쟁 당시 미국에서 일본군의 개입을 천명하자, 이승만은 주한미국 대사에게 일본군이 개입하면 일본군부터 먼저 축출할 것이라고 하여 일본군 참전을 취소시켰다.

 

한편 서울이 점령되었을 무렵, 이승만은 일본에 임시 망명정부를 수립할 계획도 고려하고 있었다. 1954년 3월 27일에는 국내에 유통 중인 일제상품 몰수를 지시했고, 55년 6월 20일에는 일본제품 특혜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한편 일본인을 만났다는 이유로 국무총리 장택상을 해임시키기도 했다.

대아시아 관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후원한 중화민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장제스를 방문하여 면담하기도 하였고, 내한한 장제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과도 우호관계를 수립하였고, 응오딘지엠 방한 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친히 수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인도의 네루와는 사이가 안 좋았는데, 네루는 이승만에게 부정적이었다. 네루는 1949년 대한민국 정부의 승인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의 대표단인 조병옥의 설득으로 반대에서 기권으로 돌려놓게 되었다.

 

동시대 인물들에 의한 평가

허정의 평가

1920년대부터 1960년 망명 전까지, 중학교 재학때 기독교청년회 영어학원에서 배우고 이후에도 이승만의 측근으로서 가까이에 있었던 허정에 의하면 이승만은 대단히 두뇌가 명석한 인물이었다.

 

허정에 의하면 자신을 대단히 높게 평가하였으며, 한국인 중에 자신과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봤다고 한다. 누구든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따르기만 하면 그는 그 사람을 동지로 간주하였으며, 그 외의 사람은 모두 그의 적이었다고 평가하였다. 또한 허정은 '그가 대단히 성격이 급하고 남들과 쉽게 싸웠으며 주요 정치문제에 대하여 대단히 완고했다'라고 평하였다.

 

허정은 '다만 처음 환국했을 때처럼 한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라, 국민의 입장에 선 초당적 지도자로서 아직도 미숙한 한국의 정당들을 공평한 입장에서 육성하여 정권의 평화로운 교체를 위한 기반을 확립하지 못한 점과 정권을 인계함으로써 훌륭한 민주적 전통을 확립하지 못한 점만은 그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허정은 이승만이 사리에 옳은 말이라면, 누구의 말이라도 수용하는 담박한 면이 있었다고 하였다. '내가 아는 우남은 유순한 호호야(好好爺)였다. 그는 기분이 좋을 때면 봄바람같이 부드러운 마음씨였고, 자신보다 20~30세 어린 연하자들에게도 반드시 공대를 하며, 사람의 방문을 받을 때엔 꼭 자리에서 일어나 맞이하였다.

 

허정에 의하면 "평소 자신보다 나이가 어리다 하여 인사를 받거나, 함부로 반말을 하지 않고 공대, 존재를 하고 맞인사를 했다. 부정이나 거짓을 보면 육친이라도 용서함이 없는 반면 옳은 일, 곧은 말이면 삼척동자의 말이라도 곧이듣는 성미였다. 또한 부드럽고 자애롭고 유머 센스가 풍부한 사람이면서도 한번 화를 내면 호랑이처럼 무섭기도 했다"라고 했다. 조크를 잘하기로도 으뜸이었다고 한다.

 

허정에 의하면 장관을 해임할 때는 그만두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한다. 허정은 직접 담화를 쓰지 않고 장관을 해임할 때도 '그 동안 수고했으니 잠시 좀 나가서 쉬게'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바람에 여러 사람이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진언을 받으면 즉시 메모하고 유익한 일이면 미루지 않고 결단으로 실천하였다. "반면 누가 나쁜 짓을 했다는 보고나 참소를 들으면 사실여부 불문곡직하고 목부터 베어놓고 연후에 진부를 가려내는 수가 적지 않았다"고도했다.

 

허정은 이승만이 농담도 잘하고, 장난도 잘 쳤으며 성격이 유머러스했다고 한다. "그는 근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매우 유머러스한 성품이어서 학관에서는 재치 넘치는 농담으로 학생들을 잘 웃겼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기분이 좋을 때의 일이고 화가 나면 아무도 당해내지 못했다""기분이 좋을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운 성격이 되어 유머를 연발했다"라고 한다.

 

허정'그는 주권재민을 앞세우면서도 카리스마적으로 군림하려는 태도가 있었다.'며 그에게는 모순되고 상반되는 두 면이 있었다. 그를 보필하는 사람들이 어느 면에 중점을 두고 그를 돕느냐에 따라 우남의 행동은 달라질 수 있었다. 만일 그가 이념적으로 앞세우고 있던 민주주의의 신념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그를 성심껏 그를 돕는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더라면 우남은 한국의 조지 워싱턴도 될 수 있었을 것 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허정은 이승만이 독립운동하기 전부터 고집스러운 태도와 가부장적인 면모를 보였다고 하였다. 일단 비위에 거슬리는 일이 있어서 고집을 부리고 화를 내면 자기 뜻을 조금이라도 굽히거나 남의 사정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는 가부장적 카리스마의 일면이 엿보였던 것이다.

 

허정"그의 유명한 고집, 이때는 확신이요 신념이었지만, 그의 고집은 우리 역사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해방 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고집한 것이며, 반공포로 석방, 일본에 대한 완강한 반대 등은 그의 고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라고 하였다. 

 

"그의 고집의 나쁜 일면은 그에게 말년의 불운을 안겨주었다. 그가 자유당에 카리스마적 인물로 군림하지 않고, 진정한 민주 정당으로 육성하려는 배려를 아끼지 않고, 또한 합헌적인 정권 교체를 통해 평화로운 정권 교체의 선례를 남겨놓았더라면, 그는 아직도 국부(國父)로서 추앙을 받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통일은 내손으로 라는 결코 나무랄 수 없는 그의 고집이 결국 슬픈 결말을 초래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면의 평가

장면"이 박사 밑에 국무총리로서 1년 가까이 지낸 내가 본 그분은 장점도 많고 단점도 많았다. 그분의 애국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일평생 독립운동에 바친 공적이 이를 말하고도 남는다. 특히 대외적으로 철석같은 반공 태세, 의연한 대일(對日) 태도, 과감한 반공 포로 석방 등은 이 박사의 용단이 아니고는 아무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독립 주권 의식의 철저한 시범도 경복 할 만큼 위대했다"라고 평가하였다.

 

장면"그분의 성격 소치인지 자존심이 너무 지나쳐 ‘나’ 이외에는 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이 안중에 보이지 않는 양 정치 면에 나타난 그분의 개성은 독재의 전형적인 감을 주었다. 정적을 용서 않고 때로는 고도의 술책과 잔인성을 주저 않고 드러냈다.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도 비위에 안 맞으면 공포 안 하기가 일쑤이며, 그의 유시나 담화가 법률 이상의 위력을 휘둘렀다. 구속된 국회의원에 대한 석방 결의도 아랑곳없고, 헌법 기관인 참의원, 헌법 위원회, 탄핵 재판소 등도 필요 없다고 구성해 주지 않았다. 장기 집권을 위하여 때로는 비민주적인 방법의 정치 파동도 일으킨 사실은 우리가 다 잘 알고 있는 바다"라고 비판하였다.

신익희의 평가

신익희는 이승만이 독립운동할 당시의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주먹구구식 계산으로 정치를 한다고 평가했다. 이승만의 제1대 대통령 당선 직후 처음 방문한 신익희"국무총리 이하 각 부 장관만 학식과 능력, 그리고 덕망 있는 사람으로 골라서 맡기시고, 그 아래는 그 사람들로 하여금 골라서 임용하도록 권리와 책임을 주십시오. 우남장께서는 이열 한 부의 장관과 네 처장만 딱 거머쥐셔서 번적 들며 줄줄이 따라 올라오고, 내려놓으면 모두가 내려앉습니다. 이렇게 하셔야지 만일 그렇지 않고 만기(萬機)를 일일이 친자(親自) 총괄하시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무리 기억력 좋고 영리한 사람이라도 사람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더구나 우남장께서는 지금 나이가 연로 하신 터에 어려우시니 그렇게 하도록 하십시오"라고 진언하였다.

 

그러나 끝까지 조용하게 듣고 있던 이승만은 신익희의 건의가 끝나자 벌떡 일어서 방안을 빙빙 돌면서 손을 입에 갖다 대고는 훅훅 불면서 "안 돼요, 믿을 사람이 누구란 말이오"하고는 국회의장실 한 구석에 앉아 있던 여자 사무원을 가리키며 "저기 앉아 있는 사환들 까지도 내가 일일이 간섭해야 해요. 그래야 모든 일이 제대로 됩니다. 해공은 모르시는 말씀이야."라고 하였다. 신익희"우남 대통령 저 어른 큰일 났다. 아직도 하와이의 사탕수수 밭에서 노무자로 이민 간 무식한 교포들과 비서 몇 사람 데리고 일하시던 그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계시니, 앞으로 정형(情形)은 어려워질 것 같구나"라고 하였다.

미군정청장 하지의 평가

하지 청장의 정치고문이었던 밀러드 굿펠로에게 하지가 1946년 6월 23일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을 "늙은 악당"으로 지칭하였는데, 이승만에 대한 하지의 태도를 알아볼 수 있다.

기타

박용만(1924)은 "이승만과 김구는 민족의 쌍벽이었고 민족진영 인사들은 두 영도자를 모시고 반석 위에 놓인 것과 같은 안도감과 신뢰감을 가지고 무조건 두 분이 영도하는 대로 마음 놓고 따랐던 것이다"라고 평가하였다.

 

장택상은 이승만의 결점으로 "이승만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먼저 행동하고 나중에 생각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택상과 조병옥은 각각 사석에서, 그리고 자신들의 회고록에 이승만보다는 안창호가 진정한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감인데 일찍 가셨다며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윤치영에 의하면 '돈암장과 이화장을 출입했던 최기일은 충분히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었으며, 인격자인 김성수와 안재홍 조차 적으로 만든 것은 이승만의 실책'이라고 평가했다. 최기일은 이승만의 아내 프란체스카 도너가 손님으로 찾아온 안재홍을 몇 번 문전박대하는 것을 보고 분개하기도 했다.

 

여운형은 해방 직후 조선체육회를 이끌던 중 이승만이 귀국한 후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했다. 그때 몽양은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이승만이 해외에서 독립을 위해 수십 년을 일하다 돌아왔으므로 일장기가 아닌 태극기를 가슴에 단 우리 청년들이 대회장에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보면 얼마나 감격할까 하는 생각에서 이승만을 개회식에 초대했다고 한다. 

 

여운형에 의하면 이승만은 윤치영과 함께 와서 내빈석에 자리를 잡았는데 식이 시작되어도 각도 청년들이 줄을 지어 씩씩하게 입장하자 몽양은 이박사가 얼마나 흐뭇해할까 하고 감격을 나누기 위해 그의 손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청년들을 보지도 않고 수행한 윤치영과 귓속말로 정치 이야기만 하더니 "일이 있어 그만 가봐야겠다"며 곧 퇴장해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정치적 노선은 다르지만 인간적인 입장에서 그를 초청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여운형은 인간적으로 섭섭했다면서 자기가 이박사에게 가장 실망을 느낀 때가 바로 그때였다고 했다.

 

김영삼은 그를 당시 가장 현실적인 지도자로 평가했다. 대한민국의 건국의 주역이 돼 사사오입 개헌 시기부터 잘못되기 시작했다고 평가하였다. 한편 김영삼은 또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다.',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다.'라고 평가하였다.

-ko.wikipedia.org- 202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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