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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by 안전제일무사고 2023.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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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아베 신조(일본어: 安倍晋三, 1954년 9월 21일~2022년 7월 8일)는 일본의 정치인이다. 자유민주당 소속의 중의원 의원이자 제90·96·97·9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제21·25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냈다.

 

일본의 전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며, 대학 졸업 후 고베 제강소의 직원으로 일했고,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외무대신의 비서관을 지냈다. 이후 제37대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지냈으며, 제72대 내각관방장관, 제21대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낸 바 있다.

 

2006년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으나 이듬해 사임했다. 이후 2012년 12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5년 3개월 만에 내각총리대신으로 재취임했다. 이후 2017년 10월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여 98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하였으며, 2018년 9월 20일에 있었던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승리하여 3선 연임에 성공해 2020년 8월까지 총리직을 맡으며 일본 역사상 최장 임기의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러나 2017년 모리토모 학원에 국유지를 팔아넘기려고 했다는 의혹이 불거졌으며, 2019년 11월 벚꽃을 보는 모임에 관한 스캔들, 2020년 코로나19에 대한 대처 실패로 인하여 국민들의 지지율이 하락하였다. 같은 해 8월 28일 기자회견을 통해 궤양성 대장염과 관련한 건강상의 문제로 사의를 표명하였다. 9월 16일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후임 총리로 취임하였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국회의원으로서 정계에 몸을 담았으며, 2021년에 자유민주당 내 파벌 조직인 세이와 정책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2022년 7월 8일 참의원 선거 유세 중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을 받아 병원에 이송되었고 같은날 17시 3분경 사망했다.

생애

출생과 성장

가족 사진, 2살 때의 아베 신조(왼쪽에서 두 번째)와 부친  아베 신타로 (오른쪽에서 두 번째)

가족 사진, 2살 때의 아베 신조(왼쪽에서 두 번째)와 부친 아베 신타로(오른쪽에서 두 번째)

 

1954년 9월 21일, 도쿄도 신주쿠구에서 당시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였던 아베 신타로와 그 아내 아베 요코(安倍 洋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적지는 야마구치현 오쓰군 유야정(현재의 나가토시)이다. 친조부는 중의원 의원이었던 아베 간, 외조부는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기시 노부스케이며, 외종조부(외조부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는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한 사토 에이사쿠이다. 이렇듯 세습 정치 가문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훗날 아베는 "어려서부터 나와 가까운 곳에 정치가 있었다"라고 회상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야구 선수를 꿈꾸기도 했으며, TV를 즐겨보며 형사가 되기를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

기시 노부스케가 입학하도록 주장한 세이케이 계열에서 소학교부터 고등학교를 거쳐 세이케이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를 비롯해 아베 간, 기시 노부스케, 사토 에이사쿠, 가정교사였던 히라사와 가쓰에이, 친척들까지 도쿄 대학 출신이 많았지만 아베 신조는 입시를 통과한 것이 아닌 에스컬레이터식으로 세이케이 대학으로 진학했다.

회사원 시절

왼쪽은 외조부이자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기시 노부스케 ,
왼쪽은 외조부이자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기시 노부스케, 오른쪽은 외종조부이자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사토 에이사쿠

 

오른쪽은 외종조부이자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사토 에이사쿠
왼쪽은 외조부이자 제56·57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기시 노부스케, 오른쪽은 외종조부이자 제61·62·63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사토 에이사쿠

 

졸업 이후 얼마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건너가 영어를 배우다가 1979년 4월 귀국한 뒤 고베 제강소에 입사하여 뉴욕 사무소, 가코가와 제철소, 도쿄 본사에서 근무했다. 이 중 가코가와 제철소에서의 경험에 대해 아베는 "나의 사회인으로서의 출발점", "나의 출발점"이었다고 회고했다.

정계 입문

비서 시절

고베 제강소에서 3년간 근무한 뒤 1982년부터 당시 외무대신에 취임한 아버지 아베 신타로의 비서관을 맡았다. 비서를 맡는 동안 각국의 수뇌와의 회담에 동석하는 등 후계자 수업을 진행해 갔다. 1987년 6월 9일, 모리나가 제과 사장 마쓰자키 아키오의 장녀인 마쓰자키 아키에와 도쿄의 프린스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의 결혼을 주선한 것은 전직 내각총리대신 후쿠다 다케오 내외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1987년 참의원 의원이었던 에지마 아쓰시(江島淳)의 사망에 따라 공석이 생긴 야마구치현 선거구 보궐선거에 출마할 뜻을 밝혔으나, 우베시의 시장을 맡고 있던 후타쓰기 히데오(二木秀夫)가 출마를 선언하자 아버지 신타로가 아들 신조의 출마를 만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의원 의원

1991년, 총리 후보로 유력하게 거론되었던 아버지 아베 신타로가 급사하면서, 1993년 제4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사망한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야마구치현 제1구(당시)에서 출마해 처음으로 당선되었다. 그 이후 야마구치현 제4구로 바뀐 해당 지역구에서 내리 9선에 성공하며 10선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소속 파벌의 영수였던 모리 요시로가 수상으로 조각한 2000년의 제2차 모리 내각 개조내각에서 나중에 총리대신이 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추천으로 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한다. 모리 내각의 뒤를 이어 출범한 2001년의 제1차 고이즈미 내각에서도 유임되었다.

 

2006년 1월,  로버트 졸릭  미국 국무부 차관과 만난 아베 신조(오른쪽)

2006년 1월, 로버트 졸릭 미국 국무부 차관과 만난 아베 신조(오른쪽)

 

2002년의 고이즈미 총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방문을 수행하고, 고이즈미 내각총리대신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에서 ‘안이한 타협은 안된다’며 강경론을 주창했다. 이후 납치 피해자 5명은 귀국했지만, 일본 내에서는 납치 문제의 타협에 난항을 거듭했다. 이후 아베는 나카야마 교코와 함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경제 제재와 무력 행사를 포함한 강경 노선을 고집했다. 대화 등의 신중론을 취한 의원들이 많던 가운데, 언론은 아베를 두고 ‘의연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고 미화하면서 이후 인기가 상승했다.

자민당 간사장

2003년 9월에는 고이즈미 총리대신에 의해 자민당의 간사장으로 발탁되었다. 3선의 국무대신 경력도 없는 젊은 의원이 간사장에 취임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지만, 11월의 총선거를 앞두고 아베의 ‘인기’를 필요로 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이후 자민당은 총선거에서 절대 안정 다수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간사장으로는 자민당 내에서 지속적으로 지급되던 떡값이나 얼음값(파벌의 영수가 소속원에게 지급하는 활동자금)을 폐지하고, 자민당 후보자의 공모제를 일부 도입하는 등 당내의 제도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2004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목표치였던 51석의 확보에 실패하면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지는 방향으로 한다’고 사임을 시사했고, 결과는 49석을 확보하면서 곧 사직했다. 같은해 9월부터는 후임 간사장이었던 다케베 쓰토무의 강한 요청으로 간사장대리에 취임했는데, 간사장 역임자가 간사장대리라는 낮은 직위로 가는 것도 이례적인 일이었다. 이후 간사장대리로 맞이한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여러 선거구에서 상대방의 낙선을 노린 고이즈미의 자객을 공천했다.

 

고이즈미 정권 말부터 ‘포스트 고이즈미’의 가장 강력한 후보로 일컬어졌고, 2005년 10월 31일에 발족한 제3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내각관방장관에 취임한다.

 

2006년 9월 1일에는 자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할 것을 발표하고, 일본국 헌법의 개정과 교육 개혁, 재정 건전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이후 고이즈미 총리의 임기가 끝나고, 9월 20일 실시된 총재 선거 투표에서 전체 703표(국회의원 403, 당원 300표) 가운데 464표를 얻어 경쟁 후보인 아소 다로 외무대신과 다니가키 사다카즈 재무대신을 큰 표차로 물리치고 일본 자유민주당의 21대 총재로 선출되어, 9월 26일 국회 중.참 양원 본회의에서 제90대 총리대신으로 지명되었다. 아베는 첫 전후 세대 총리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내각총리대신 중에서 가장 젊다.

1차 집권 시기(2006~2007)

아베 신조(2006년)

아베 신조(2006년)

 

취임 일성에서 아베는 고이즈미 전 총리의 구조 개혁을 이어받을 것임을 시사했으며, 국가상으로는 "아름다운 나라"를 제시했다.

 

총리에 취임한 그는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로 중단되었던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에 방문할 것을 발표하고, 10월 8일에는 베이징에서 후진타오 국가주석을, 9일에는 서울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회담을 가져 양국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시도했다.

 

그러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제1차 핵 실험을 실시하자 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실험은) 일본의 안전 보장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평하고,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제제 결의보다 엄격한 경제제재 조치를 취했다.

 

이후 12월에는 교육기본법의 개정과 방위청의 성(省) 승격을 강행했다. 같은 달 혼마 세제회장이 공무원 기숙사의 애인 문제로 사임하고, 사다 겐이치로 행정개혁대신이 사무소 운영비 계상 문제로 사임했다.

 

2007년에 열린 제166회 통상국회에서는 많은 주요 법안들을 강행 표결하여 잇달아 통과시켰다.

 

2007년 G8 회담에서의 각국 수뇌들과 함께한 모습.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아베 신조

2007년 G8 회담에서의 각국 수뇌들과 함께한 모습.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아베 신조

 

5월 초순에는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고, 고이즈미 내각 이후 미일관계가 지속적으로 굳건한 것을 어필했다. 같은 달, 이전부터 여러 가지 의혹이 제기된 마쓰오카 도시카쓰 농림수산대신이 자살하고, 연금 기록 문제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런 와중에 6월초의 지지율이 고이즈미 정권 이래 최저라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후 규마 후미오 방위대신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를 두고 ‘어쩔 수 없다’고 발언하는 일까지 일어나자, 처음에는 문제가 없다는 자세를 취한 아베 총리는 이후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규마 방위상에 대해 주의를 부탁했다. 다음날에는 규마 방위상이 사임했다.

참의원 선거 참패 및 개각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는 자살한 마쓰오카의 후임 아카기 노리히코 농림수산대신의 사무소 비용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어 니가타 현 주에쓰 오키 지진이 발생하면서 유세를 중단하고 현지로 향했다.

 

선거에서는 연금 문제의 해결과, ‘개혁할 수 없는 야당보다, 책임정당 자민당이 개혁의 실행력을 가지고 있다’고 호소하며 결과를 낙관했지만 결국 연립 정권의 공명당과 합쳐도 과반수가 되지 않는 역사적인 대패를 맞았다.

 

그동안 자민당의 견고하게 지켜온 도호쿠 지방과 시코쿠 지방에서 전멸하고 선거의 승패를 좌우하는 소선거구에서도 일제히 민주당 후보와 야당 계열 무소속에게 의석을 빼앗겼다.

 

7월 30일 오전, 그는 “유감스러운 결과가 되었다. 지지해 준 사람에게는 미안하다. 국민의 목소리를 받아들이면서 앞으로도 책임을 수행해 가겠다”라고 정권을 계속할 방침을 발표했다. 이어 나카가와 히데나오 자민당 간사장은 “총재·총리의 결의를 일원이 되어 지지하고 진행하자”라고 발표해, 아베 총리를 지지하는 방침을 결정했다.

 

그러나 7월 31일, 자민당 총무회에서 "결단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발언을 시작으로 당내에서 아베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8월 1일이 되어서 농림수산대신을 경질하는 등 쇄신을 꾀했지만 "너무 늦었다."라는 당내 비판만 더 키우게 됐다.

 

이후 8월 27일 새로 조직한 제1차 아베 신조 개조 내각이 출범하자마자 각료의 문제가 제기되면서 정권의 구심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9월 9일에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의 종료에 즈음해 열린 기자회견에서 ‘9월 10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테러 특별조치법을 연장할 수 없을 때에는 내각총사직을 한다고 공언했다.

 

APEC 정상회의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 과 악수하는 모습(2007년 9월 8일)

APEC 정상회의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악수하는 모습(2007년 9월 8일)

 

갑작스러운 사의 표명

 

그러나 2007년 9월 12일 오후 2시, “내각총리대신에서 물러난다”는 내용의 내각총사직을 표명한 기자회견을 가졌으며, 이로 인해 같은 날로 예정되었던 중의원에서의 대표 질문이 불가능해졌다.

 

그는 사직의 이유로 “테러특별조치법의 재연장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 대표와의 회담을 타진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고, 이대로 총리직을 계속 수행하는 것보다는 새 총리가 수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판단했다.”였으며, “내가 총리인 것이 장애가 되고 있다”고 발언했다(다만 언급된 오자와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타진을 받은 것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라고 부정). 자신의 병이 악화되어 몸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이유도 있었다고 요사노 가오루 내각관방장관이 회견을 통해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임시국회가 개막해 내정과 외교에 중요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국회에서 소신을 표명한 이틀 만에 물러난다는 뜻을 발표한 것은 무책임하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한편 아소 다로 간사장은 같은 날의 회견에서 기자의 “총리는 언제 사임을 결심한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이틀 정도 전이라고 하기도 그렇고, 어제라고 하기도 그렇고…”라고 발언해 이틀 전쯤에는 이미 아베 총리가 조만간 사임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을 밝혔다.

 

사의를 표한 9월 13일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 입원하고, 검사 결과 위장 기능 이상의 소견이 보이며 상당히 쇠약해진 상태라고 의사단이 발표했다.

 

9월 13일 아사히 신문이 실시한 긴급 여론조사에서는 "현안이 산적한 상황에서 소신 표명 직후 사퇴한 것은 무책임하다"는 의견이 70%에 달하기도 했다.

 

아베의 갑작스러운 사임 소식은 일본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언론들도 톱뉴스로 보도하는 등 큰 관심을 보였다. 미국의 CNN "일본의 아베 총리가 갑작스럽게 사임", "사임 압박을 견디지 못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밖에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 "무사도(武士道)가 아니다. 겁쟁이다"라며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고, 다른 서방 언론들 중에서도 중요한 외교 일정을 앞두고 사임한 것은 무책임하다는 비판적 의견이 많았다.

 

또한 파이낸셜 타임스는 "지금 당장 중의원 해산으로 총선거가 치러진다면 제1 야당인 민주당이 정권교체를 이룰 가능성이 높다. 다만, 자민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탈당한 과거 자민당 비주류 정치인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는 민주당이 현재 자민당 정권보다 더 나은 정치를 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라고 지적했다.

총리 퇴임 후

컨디션 회복 후 활동 재개

총리 퇴임 후 위장 이상 문제로 입원하고 있던 게이오기주쿠 대학병원에서 임시 퇴원하여 도쿄 시부야구의 자택에서 요양에 들어갔다.

 

이후 2007년 11월 13일, 테러특별조치법 표결에 참여하기 위해 중의원 본회의에 참석한 뒤 후쿠다 야스오 총리와 공명당의 오타 아키히로 대표에게 컨디션이 회복됐다고 전하며 사실상 활동 재개를 밝혔다.

 

2007년 말 산케이 신문과의 인터뷰에서는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는 이제 막 시작됐다"며 2008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재개한다고 밝힌 뒤 "서서히 굳건해지고 있는 양질의 보수 기반을 더욱 넓혀 나갈 것"이라고 답했다.

 

2008년 1월에는 문예춘추에 수기를 기고했다. 여기서 아베는 2007년 9월 퇴진에 관련해서 "소신 표명 연설에서 컨디션이 안 좋아지는 바람에 연설문 원고 3줄을 건너뛰는 실수를 범했다. 이대로 총리직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퇴진의 결정적 요인 중 하나였다"라고 고백하는 등 사임의 이유 중에는 건강 문제도 컸음을 밝혔다.

 

2008년 3월 5일에는 연구회인 "쿨 어스 50 간담회"를 만들어 시오자키 야스히사세코 히로시게와 함께 참여했다. 연구회 설립에 즈음해 아베는 "홋카이도 G8 정상회담을 성공시키는 것은 나의 책임"이라고 말한 뒤 이와 관련된 협의회장에 취임했다.

 

3월 6일에는 소속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마치무라파) 총회에 참석해 "총리로서 1년간 아름다운 나라 만들기에 전력을 다했으나 아쉽게 힘이 미치지 못했다. 나의 사임에 대한 비난도 강했던 것을 알고 있다. 진심으로 사과를 드리고 싶다"라고 말하고 소속 의원들에게 사과했다.

 

제4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에 정권을 내준 직후 열린 2009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는 아소 다로와 함께 히라누마 다케오의 복당에 따른 총재 선거 출마를 독려했지만, 히라누마가 출마를 고사하자 무산되고 니시무라 야스토시를 지원했다.

 

자민당 총재 재취임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2012년)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2012년)

 

2012년 9월 12일, 다니가키 사다카즈 총재의 임기 만료에 따라 열리는 2012년 일본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 출마할 뜻을 표명했다. 자신이 소속된 파벌인 세이와 정책연구회(마치무라파)의 회장인 마치무라 노부타카의 출마가 이미 언급되고 있어서 출마에 대한 신중한 결정이 요구되고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출마한다.

 

이로 인해 파벌이 분열되면서 아베는 자신의 파벌에서 충분한 표를 얻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고, 5년 전 총리 사퇴 과정에서의 부정적 이미지가 남아 있는 점이 약점으로 작용했다. 또 당시에 당내에서 대중의 인기가 높았던 이시바 시게루가 부상하고 있었던 것, 당내 중진의 도움을 받아 출마한 이시하라 노부테루 등 거물들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아베는 이들에게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그러나 아베 역시 아소 다로고무라 마사히코 등 당내 중진 및 유력 파벌의 지지를 바탕으로 9월 26일 열린 본 투표에서 이시바 시게루에 이어 2위를 차지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과반 득표를 하지 못해 1, 2위 후보를 대상으로 결선 투표를 실시하였는데, 표가 역전되어 아베가 1위를 차지하면서 아베 108표 대 이시바 89표로써 총재에 당선되었다. 

 

한번 사임한 총재가 다시 선출된 것은 자민당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고 결선 투표에서 표가 역전된 것은 1956년 12월 이후 처음이었다.

2차 집권 시기(2012~2020)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발족 후의 기념 촬영(2012년 12월 26일)

제2차 아베 신조 내각 발족 후의 기념 촬영(2012년 12월 26일)

 

2012년 12월 16일 실시된 제46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압승하면서 민주당에 정권을 빼앗긴지 약 3년 3개월 만에 다시 여당 자리를 탈환했다. 이후 12월 26일 국회에서 아베가 제96대 내각총리대신에 선출되면서 제2차 아베 신조 내각이 출범했다.

 

한 번 재임했다가 사임한 내각총리대신의 재취임은 일본국 헌법 하에서는 요시다 시게루 이후 두 번째이다.

재집권 이후에는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기 위해 물가 안정 목표를 설정한 다음, 일본은행법 개정도 염두에 두고 양적 완화 조치를 강구하여 계속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에서 탈출하기 위한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대담한 양적 완화", "기동적인 재정 동원", "민간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한 성장 전략" 등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진 일련의 경제 정책은 흔히 "아베노믹스"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아베노믹스"라는 단어는 2013년 신어·유행어 대상 탑10에 들어, 아베가 직접 그 상을 수상했다.

2013년 참의원 선거 승리

 

지난 1차 집권 시기 아베가 참패를 당한 경험이 있는 제21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참의원에서는 2009년에서 2010년까지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집권 여당이 참의원 과반수를 밑도는 "네지레 국회(직역하면 뒤틀린 국회)"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2013년 7월 21일의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자민공명 연립 여당이 과반 의석을 확보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해소되었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유치

2013년 9월 7일,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열린 제125차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도쿄가 2020년 하계 올림픽 및 패럴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다. 아베는 재집권 이후 도쿄 올림픽 유치위원회 최고 고문으로서 각국 정상들과의 회담이나 국제회의 때마다 도쿄 올림픽 유치를 어필해 왔다.

 

이어 2013년 3월 일본을 방문한 IOC 평가위원회와의 공식 환영 행사에서 연설을 하고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아베는 1964년 하계 올림픽 개최지가 도쿄로 결정되었을 당시 총리가 자신의 외조부인 기시 노부스케였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스스로 IOC 총회에 참석해 프레젠테이션까지 하는 의욕을 보였다.

 

또 아베는 개최지 결정 직전인 2013년 9월 5일~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에서 도중 이탈해 급하게 부에노스아이레스로 날아와 IOC 위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개최지 결정을 앞두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면서는 "후쿠시마에 대해 염려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안전을 보증해 드리겠습니다.

상황은 통제되고 있습니다. 도쿄에는 어떠한 악영향도 지금까지 미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미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위원장 및 IOC 위원 여러분, 도쿄에서, 지금도, 그리고 2020년이 되어서도 세계 유수의 안전한 도시인 도쿄에서 대회를 열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명예일 것입니다.

후쿠시마에 대해서 염려하시는 것에 대해서는, 제가 보증을 해드리겠습니다. 상황은 통제되고 있습니다. 도쿄에는 어떠한 악영향도 지금까지 미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미칠 일은 없을 것입니다.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다른 어떤 경기장과도 닮지 않은 새 경기장에서 확실한 재정 조치에 이르기까지 2020년 도쿄 대회는 그 확실한 실행이 확증된 것이 됩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훨씬 더 중요한 메시지를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은, 우리 일본인이야말로 올림픽 운동을 실로 신봉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저부터가 하나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간 것은 1973년으로, 그때 시작한 것이 양궁이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그전 해, 뮌헨에서 올림픽 역사로서는 오랜만에 양궁이 올림픽 종목으로 부활한 일이 있었습니다. 저의 올림픽에 대한 사랑은 그때 이미 확고했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지금도 이렇게 눈을 감으면, 1964년 도쿄 대회 개막식의 정경이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일제히 맞은 몇천 마리에 달하는 비둘기, 검푸른 하늘의 높이, 5개의 제트기가 그리는 올림픽 고리, 모든 것이 불과 10살이었던 저에게는 눈부신 것이었습니다. 스포츠야말로 세계를 연결한다. 그리고 만인에게 동등한 기회를 주는 것이 스포츠라고 우리는 배웠습니다. 올림픽의 유산이란 건축물만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국가적으로 추진한 여러 가지 프로젝트의 이야기만도 아닙니다. 그것은 글로벌한 비전을 가지는 것, 그리고 인간에 대한 투자를 하는 것이라고 올림픽의 정신은 우리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듬해에 일본은 자원봉사 조직을 만들었습니다. 넓고, 멀리까지 스포츠의 메시지를 보내는 일에 나섰던 것입니다. 이후 3000명에 달하는 일본의 젊은이들이 스포츠 기술 지도자로 일하고 있습니다. 부임한 국가는 80개국을 뛰어넘는 숫자에 이릅니다. 그들은 활동을 통해서 100만이 넘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것입니다.

경애하는 IOC 위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2020년에 도쿄를 선택한 것은 올림픽 운동의 하나인 새롭고 힘찬 추진력을 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시하려고 하는 "스포츠 포 투모로우(Sports for Tomorrow)"의 새로운 계획 아래, 일본의 젊은이는 더 많이 세계로 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학교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스포츠 기구를 제공할 겁니다. 체육 교육 과정을 만드는 것을 도와줄 것입니다. 머지않아, 올림픽 성화가 2020년에 도쿄에 올 때까지 그들은 스포츠의 기쁨을 100개가 넘는 국가에 1000만이 넘는 사람들에게 직접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도쿄를 선택한 것, 그것은 올림픽 운동의 신봉자를 정열과 자긍심으로 가득한 견고한 신봉자로 선택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포츠의 힘으로 세계를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IOC와 함께 일하는 것을 매우 사랑하는 나라를 택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들은 여러분과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2013년 9월 7일, 제125차 IOC 총회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프레젠테이션

연설 후의 질의응답에서는 IOC 총회 직전에 밝혀진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의 방사능 오염수 누출에 관한 질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아베는 "결론부터 말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 (뉴스의) 헤드라인이 아니라 사실을 봐달라. 오염수의 영향은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의 항만 내 0.3 평방킬로미터 범위 내에서 완전히 차단되고 있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현재도, 장래에도 전혀 문제가 없다. 완전히 문제가 없게 만들기 위해 근본적 해결을 위한 프로그램을 내가 책임지고 결정하는 일에 이미 착수했다"라면서 "아이들의 장래나 일본에 오는 선수들에 대한 책임을 완전히 지겠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후 오염수 유출 소식은 끊이지 않았고, 아베의 발언이 도쿄 전력이 공개한 상황과도 달라 상황이 통제되지 못한 것이 드러나면서, 국회에서 야당 의원들에게 집중 추궁을 당하기도 했다. 아베는 이러한 추궁에 대해 "사태는 통제되고 있고, 대응을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컨트롤'되고 있다고 말씀드린다"라고 항변하였다.

 

또한 2013년 9월 19일 후쿠시마 제1 원자력 발전소를 시찰한 자리에서 아베는 도쿄 전력 관계자에게 "오염수의 영향을 받는 0.3 평방킬로미터는 얼마만큼인가?"라고 물었고, 이 때문에 총리가 사전에 실제 방사능 오염수의 영향을 받는 범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고 현장에 왔을 가능성이 있다고 교도 통신이 보도했다.

2016년 참의원 선거 승리

 

니카이 도시히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왼쪽)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아베 신조(2016년 5월 23일)

니카이 도시히로 자유민주당 간사장(왼쪽)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아베 신조(2016년 5월 23일)

 

2016년 7월 10일 제24회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는 홋카이도도호쿠 지방신에쓰 지방오키나와현에서 고전했지만 직전 선거를 웃도는 의석을 획득했다. 아베는 "이 선거 결과를 통해 아베노믹스가 신임을 얻었다"라고 주장했다.

2017년 도쿄도의회 선거 패배

 

2017년 7월 실시된 도쿄도의회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종전의 57석에서 23석으로 의석이 줄어들고 대신 도민퍼스트회가 크게 약진하면서, 자민당이 참패했다고 평가받는 지난 2009년 도쿄도의회 선거에서의 38석에도 못 미치는 사상 최소 의석 수에 그쳤다. 이에 대해 아베는 "매우 엄격한 도민의 심판이 나왔다. 자민당에 대한 엄중한 질타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깊이 반성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패배의 원인에 대해서는 "정권이 출범한 지 5년 가까이가 지나면서 아베 정권이 게을러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을 것이다.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정권을 탈환했을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전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2017년 중의원 선거 승리

 

선거 전 의석 수와 같은 284석을 얻어 자민당이 승리했다. 지역구에서 218석, 비례대표에서 66석을 얻었다. 이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하려던 3명이 자민당에 입당해 공천을 받았다.

2025년 오사카 세계 박람회(Expo) 유치

 

2018년 11월 23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 기구(BIE) 총회에서 오사카부가 2025년 세계 박람회(Expo) 개최지로 결정됐다. 아베는 영상 메시지를 통해 "오사카, 간사이, 일본 사람들이 여러분을 맞아 함께 활동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성공은 약속되어 있다"라며 오사카 유치를 어필했다. 개최가 결정되자 아베는 세코 히로시게"국제 박람회 담당 대신"으로 임명하였다.

 

2019년 참의원 선거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를 앞두고 후쿠오카에서 가두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2019년 7월)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앞두고 후쿠오카에서 가두 연설하고 있는 아베 신조(2019년 7월)

 

자민당이 57석의 개선 의석을 획득하였고, 비 개선 의석인 56석을 합쳐 총 113석이 되었다. 연립 여당인 공명당의 28석을 더해 여권 전체 의석수는 141석으로, 참의원 과반수를 유지했다. 그러나 일본 정계의 화두이자 아베 정권의 목표이기도 했던 개헌을 위해 필요한 전체 의석의 3분의 2 확보는 자민·공명 연립 여당과 함께 개헌에 찬성하는 일본유신회와 일부 무소속 의원을 다 합쳐도 3분의 2인 164석에 이르지 못하면서, 개헌 추진에 어려움이 생겼다.

 

아베는 "국민민주당의 일부 개헌 찬성 세력의 협력을 얻어 조기에 개헌을 추진하겠다"라고 밝혔으나, 연립 여당인 공명당에서 개헌 자체에 부정적인 인사가 존재하는 관계로 난항에 빠졌다.

 

총리 통산·연속 재임기간 기록 경신

내각 홍보실 에서 공표된 초상(2020년)

내각 홍보실에서 공표된 초상(2020년)

 

2019년 11월 20일, 내각총리대신 통산 재임일 수가 2,887일이 되어 이전까지 최장이었던 가쓰라 다로의 2,886일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2020년 8월 24일에는 연속 재임일수가 2,799일을 돌파하여 이전까지 최장이었던 사토 에이사쿠의 2,798일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하였다.

 

코로나19 범유행에 대한 대처 실패와 각종 논란

 

코로나19 발병 초기, 아베는 1월 27일 제201회 국회 · 중의원 예산위원회 · 2019년도 추경 예산 심의에서 일본 내에서 감염이 확인된 경우 감염증 예방 및 감염증 환자에 대한 의료에 관한 법률(감염법)에 따라 강제 입원 등의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지정 감염증(指定感染症)에 대한 방침을 표명해 대처에 나섰다. 2월 5일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에서 다수의 확진자가 속출하자 정부 차원에서 대처하지 못해 논란이 일었다. 또 통계에서 프린세스호 내 확진자들을 제외시키는 등으로 비판을 받았다.

 

3월 5일 아베는 3월 9일부터 한국, 중국에서 오는 항공기는 나리타 공항과 간사이 공항에만 착륙할 수 있게 하고 한국인과 중국인 입국자들을 2주간 격리시키도록 하는 방침을 내놓았다. 또 입국금지 제한 조치 지역을 대구광역시와 청도군에서 경북 일부 지역으로 확대하고, 한국, 중국의 비자를 3월 말까지 효력을 정지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 방침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으며 대한민국 정부도 일본인의 한국 무비자 입국을 중단하고, 기존 일본의 비자 효력 정지를 감행한데 이어 일본 전역의 여행경보를 2단계(여행유의)로 상향하면서 똑같이 대응하였다.

 

3월 30일에는 본래 2020년 치러질 예정이었던 2020년 하계 올림픽을 1년 연기하면서 하계 올림픽 최초로 연기된 사례가 되었다. 4월에는 코로나19에 대한 첫 긴급사태를 선언했고, 5월 4일에는 긴급사태를 5월 31일까지 연기하면서 이에 대한 대국민 사과를 진행했다.

 

5월 11일 검사장과 검사총장 정년을 3년간 연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검찰청법 개정안이 발표되자 국민들은 검찰청법 개정안에 항의하는 운동을 벌였고, 5월 14일 39개 현에 긴급사태 조치를 해제하라는 명령을 지시했다. 5월 18일 일본 내 여론을 받아들여 검찰청법 개정안을 보류 처리시켰다. 하지만 지지율은 30% 대까지 떨어지면서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총리직 사임

기자회견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아베 (2020년 8월 28일)

기자회견에서 사의를 표명하는 아베
(2020년 8월 28일)

 

2020년 8월 28일, 지병인 궤양성 대장염의 악화로 총리직 수행과 국정 운영에 차질을 빚는 사태를 막기 위해 총리직에서 사임하기로 뜻을 굳혔다는 여러 언론의 보도가 나왔고, 이후 총리대신 관저에서 열린 임시 각의(국무회의)에서 사임 의사를 밝혔다.

 

이어 오후 5시에 관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아베는 공식적으로 사임을 표명하고, "여러 정책이 실현되는 와중에, 그리고 코로나19라는 재난 속에서, 직에서 물러나는 것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라고 말했다. 또 집권 기간을 회상하며 "북조선(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납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은 뼈아픈 일이다. 러시아와의 평화 조약, 헌법 개정 등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직을 떠나 장(腸)이 끊어지는 심정이다"라고도 했다. 다만 후임 총리가 임명될 때까지는 총리직과 자민당 총재직을 유지할 것임을 밝혔다. 향후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국회의원으로서 활동을 계속해 나가고 싶다. 차기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한 명의 자민당 의원으로서 협력하고 지원해 나가겠다"라고 말했다.

 

한편 한 기자가 아베에게 후임 총리로 거론되는 인물들에 대한 평가를 묻자 "모두가 유망한 분들이며, 내각과 당에서 함께 일했던 분들이다. 서로의 정책을 두고 경쟁을 벌이다 보면 아마 훌륭한 분이 결정될 것이다. 그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것은 제가 드릴 말씀이 아니다"라며 말을 아꼈다.

 

따라서 자민당은 현직 총재인 아베의 중도 사임으로 남은 임기 1년을 채울 총재 보궐선거를 실시하게 되었다. 아베는 새 총재 선출 시기와 선거 방식의 결정을 전적으로 니카이 도시히로 간사장에게 맡겼다.

 

니카이 간사장은 총재 선거에서 전당원 투표는 생략하고 양원(중의원참의원) 의원총회에서 총재를 선출하는 '약식 선거'를 실시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뜻을 밝혔다.

 

따라서 전당원 투표를 실시하지 않는 대신 각 도도부현(광역자치단체) 지부 연합회 대표만이 투표에 참여하게 되었고, 2020년 9월 14일 진행된 투개표를 통해 스가 요시히데가 새 총재에 선출되었다.

 

2020년 9월 16일 오전, 아베는 각의(국무회의)를 소집하고 내각 총사퇴를 의결했다. 

 

같은 날 국회에서 스가 요시히데가 새 총리에 지명되었고, 오후 6시경 황거(황궁)에서 스가가 나루히토 천황의 임명장을 받고 총리직에 취임하면서 아베는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연속 재임일 수는 2,822일, 통산 재임일수는 3,188일을 기록했다.

 

연설 중의 총격 사건

 

2022년 7월 8일 오전 11시 30분경 나라현 나라시에서 세이와 정책연구회의 일원인 사토 게이의 참의원 선거 유세를 돕기 위해 야마토사이다이지역 부근에서 연설을 하던 도중에 해상자위대 자위관 출신인 야마가미 데쓰야의 총격을 받았다. 피습 직후 헬리콥터로 가시하라시의 나라 현립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 이송 도중 심정지 상태로 위중한 상태에 빠졌다. 이후 오후 5시 3분경 심장 및 대혈관 손상으로 인한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자유민주당은 5시 46분경에 아베가 공식적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사후

故 아베 신조 국장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장의 위원장  기시다 후미오

故 아베 신조 국장식에서 추도사를 하는 장의 위원장 기시다 후미오

 

같은 해 7월 14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같은 해 가을에 아베의 국장을 치를 뜻을 밝혔다.

7월 22일 정부는 일본무도관에서 9월 27일 국장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 후, 국장은 예정대로 거행되어 전후 일본에서는 천황·황후를 제외하고 요시다 시게루 이래 2번째가 되었다.

기시다의 국장 실시의 표명을 받아 야마구치현 지사 무라오카 쓰구마사는 7월 15일, 기자단의 취재에 응해 아베의 현민장을 실시할 생각을 나타냈다.

 

8월 3일 아내 아키에는 야마구치현청을 방문해 무라오카와 면회했다. 아키에의 승낙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무라오카는 같은 날, 시모노세키시에 있는 현 국제 종합 센터 '해협 메세지 시모노세키'에서 현민장을 10월 15일에 실시할 방침을 재차 말했다.

 

같은 해 8월 29일 자민당의 두 의원연맹인 '보수단결모임''산업과 전통문화 등에 대한 삼베를 쓰는 공부회'는 중앙당에서 각각 모임을 갖고 아베를 '영구고문'으로 선임했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구. 통일교)은 같은 해 8월 12일에 서울에서 연 국제회의에서 아베를 특별히 추모했다.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10분에 걸친 영상 메시지를 보내 "아베 전 총리는 좋은 친구이자 위대한 인물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그리워할 것이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또 교단은 9월 7일 한국 신문 13개에 성명문이라는 제목의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불의의 서거를 맞은 아베 신조 전 총리에 대해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아베 전 총리의 숭고한 희생을 가정연합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라며 재차 아베의 죽음을 애도했다.

-ko.wikipedia.org- 202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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