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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 바로세우자

백제

by 안전제일무사고 2023. 1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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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경 백제의 강역.   백제의 직할령   백제의 세력권인 옛 마한 계열국 및 탐라

 

백제(百濟)는 한국의 고대 국가 중 하나로, 고구려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를 구성하였다. 시조는 부여·고구려에서 남하한 온조왕으로 전해지며, 마한 54개 연맹체 중 하나인 십제국으로 시작해 6세기경 마한을 병합했다.

 

이복지간인 고구려 건국 세력에 밀려 부여권 일대에서 해상으로 피난한 온조 부족이 기원전 18년 한강 하류의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건국되었다. 삼국지에는 십제가 마한의 일부였다고 한다. 마한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삼한 중 가장 큰 정치 집단으로, 54개 부족국가 연맹체다. 마한의 54개 부족국가는 지금의 충청도(충청북도, 충청남도)·전라도(전라북도, 전라남도)에 해당하며, 초창기에는 강원도 서부와 황해도 남부까지도 영향력이 있었다. 그러나 부여 계통의 온조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십제국(十濟國)이 마한에서 세력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십제국은 1세기에서 3세기에 걸쳐서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및 한사군과 대립하면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며 4세기부터 마한 남부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4세기 중엽에는 마한 정벌을 단행해 마한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고구려와 대립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초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아신왕이 굴복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수난을 당하였다. 그리고 475년에는 한강 유역을 상실하고 웅진으로 수도를 옮겼다.

 

538년 성왕 시절에는 수도를 웅진(熊津 : 충청남도 공주시)에서 사비성(泗沘城 :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옮기고 국호를 일시적으로 남부여(南扶余)로 변경하였으며, 신라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협공하여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인해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였고 결국 성왕은 관산성에서 사망하였다.

 

국력이 계속 약화되며 영토가 수축하다가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 공격을 받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멸망했다. 그 후 백제 부흥 운동이 일어나 왜국의 인질이었던 부여풍을 임시 국왕으로 추대하며 투쟁을 이어갔지만 권력다툼으로 내분이 발생하면서 백제 부흥 운동은 실패하였다.

 

국호

 

기록상 백제는 나라 이름을 몇 차례 바꾸었다. 삼국사기에 처음 나오는 백제의 국호는 십제(十濟)이다. 그러다 온조왕(溫祚王)이 형인 비류(沸流)가 다스리던 백성을 합쳐 더 큰 나라를 만들 때 비류의 백성들이 모두 즐거워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百濟)로 고쳤다는 설명이 있다.

 

한편 중국 측의 역사서인 『수서(隋書)』 백제전에는 처음에 백여 호(戶)가 바다를 건너[百家濟海] 남하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백제라 하였다고 씌어 있다. 백제의 국호에 대한 삼국사기와 수서의 설명 가운데 어느 쪽이 맞는지는 아직 가려내기 어렵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성왕 16년, 538년에 웅진에서 사비로 천도하며,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꿨다. 다만 남부여라는 국호가 멸망 때까지 사용되었는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왜냐하면 1995년에 발견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에서 “백제창왕(百濟昌王)”이라는 표현이 보이기 때문이다.

 

성왕이 국호를 남부여로 했음에도 바로 다음 왕인 창왕, 즉 위덕왕대에 와서 다시 백제(百濟)라고 표현한 것은 그만큼 성왕의 의도가 위덕왕대에 부정되고 있었던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백제의 별칭으로는 응, 응준, 응유가 있으며, 예군 묘지명에 나타나는 일본이 백제를 가리킨다는 가설도 제기되었다.

 

-ko.wikipedia.org- 202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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