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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식 바로세우자

붕당 정치

by 안전제일무사고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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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

붕당(朋黨)은 조선 중기 이후 특정한 지역적, 학문적, 정치적 입장을 공유하는 양반들이 모여 구성한 정치 집단이다. 붕당 정치(朋黨政治)는 학문적 유대를 바탕으로 형성된 각 붕당들 사이의 공존을 특징으로 하는 조선의 독특한 정치 운영 형태를 말한다. 현대의 정당(政黨)처럼 정치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구분된 집단이 아니라 지연, 학연, 이해관계에 따라 무리가 니뉘고 구성되었으므로 붕당(朋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하여 균형을 이루고 공존을 원칙으로 하는 붕당 정치는 현대의 정당 정치와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정치적인 이해 관계는 물론 구성원 사이에 학문적 유대 또한 공유했다는 점이 조선 시대 붕당의 특수한 성격이다. 또한 정치적 역학 관계의 정립에 있어서 탕평론은 국왕에 의한 타율적 정리라고 한다면, 붕당론은 자율적 힘의 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초기부터 권력을 장악한 훈구파(勳舊派)는 15세기 후반 성종때부터 중앙에 진출한 사림파(士林派)와 대립하였다. 훈구파는 4차례의 사화(士禍)를 통해 사림파를 탄압했으나 사림파는 이를 극복하고 16세기 중엽 선조때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1575년(선조 8년) 동서분당(東西分黨) 사건을 계기로 사림파는 서인과 동인으로 분파되며 본격적으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시작의 근본 원인은 당시 완전히 정리되지 않은 훈구 정치의 청산과 향후 국정운영의 방법을 놓고 선후배 세대간의 입장 차이와 한정된 관직을 둘러싼 경쟁에 있었다.

 

이 시기의 붕당은 특정 가문의 권세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을 막고, 공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을 통해 조선 중기 정치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러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즉위한 19세기 초엽 이후 붕당 정치 체제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특정 양반 가문이 권력을 쥐고 독재하는 세도정치로 변질되었다. 붕당 정치를 당쟁(黨爭) 또는 당파 싸움이라고도 부르나, 이 용어에 대한 역사적 근거는 없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조정에서 이루어지는 의견의 교환과 대립에 대해 당의(黨議)라고 표현하였다.

 

동인북인남인으로 분파되었는데, 북인은 다시 대북소북으로 나뉜후,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북이 득세하며 소북은 몰락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대북이 숙청당한후 서인남인이 정권을 잡았다. 경신환국(1680)으로 남인이 몰락한후 득세한 서인노론소론으로 나뉘었다. 을사처분(1725)으로 노론이 정권을 잡았으나 임오화변(1762)을 계기로 시파와 벽파로 분파되었다. 순조때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 남인시파가 숙청을 당하며 재기불능상태가 되고 벽파가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어 순조의 외척인 안동 김씨가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고, 조선의 붕당 정치는 붕괴하고 말았다.

배경

붕당의 기원

붕당은 본래 중국에서 정치인의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 유교적 정치 이념하에서 붕당을 형성하는 것은 범죄로 인식되었다. 조선의 군주체제에서도 신료가 붕당을 결집하는 것은 범죄에 해당하며, 성종때 완성된 《경국대전》에는 이에 대한 처벌 규정이 들어 있다. 그러나 송나라 이후 신유학에서는 구양수(歐陽修)와 주희(朱熹) 등에 의해 성리학 이념은 군자(君子)끼리 모인 '군자당'(君子黨)소인(小人)을 배제하고 정치를 주도하여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이를 받아들인 조선의 유학자들도 조선 중기 이후 붕당을 결집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의 조정 장악

1567년에 후계없이 명종이 죽자 선조가 즉위하여 조선 최초로 방계가문이 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선조는 중종의 서손으로 즉위시점에 부모가 모두 사망한 상태였으며 외척세력도 약했고, 2년전에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죽었으며, 명종의 왕비인 인순왕후는 1년만에 수렴청정을 거둔후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선조는 지난 기묘사화(1519년)때 희생된 자들을 사면, 복권하여 사림의 조정진출의 길을 열어 놓았고, 비록 조광조가 기묘사화때 죽었으나 그의 개혁의 유산으로 강화된 이조전랑의 권한을 바탕으로 사림파가 대거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다. 선조 역시 성리학 이념에 충실한 사림을 가까이 하고 공신과 왕실의 외척을 배척하자 자연스럽게 척신정치가 사라지고 훈구파는 사림으로 흡수되었다.

 

선조는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讀書堂, 호당)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하였다. 이이(李珥)의 유명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이 독서당에서 제출된 것이다. 사림 정치가 확산되면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이른바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리는 문치주의의 절정을 꽃피웠다. 그러나 사림이 많아지면서 기성 사림과 신진 사림의 분화가 촉진되고 여러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서로 경쟁하는 양태로 변하였다. 성리학에서는 군자(君子)들의 붕당 형성을 긍정하였기 때문에 사림 정치가 붕당 성립을 가져오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근본 원인

조선 시대에 붕당이 발달하게 된 원인에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유학파(儒學派)의 대립, 둘째, 왕실 내척(王室內戚)의 내분, 셋째, 제도상의 결함이다. 특히 제도상의 결함은 양반의 수는 늘어가는데 양반에게 수급권을 줄 토지가 모자라게 된 데에도 원인이 있다. 이 와중에 과전법은 직전법으로 바뀌면서 기성세력과 신진 세력 사이에 알력이 생겨났다. 이는 달리 보면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성종 때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나 연산군 때부터 차츰 불거지게 되었고, 결국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심의겸(沈義謙)의 대립이 직접적 원인으로 작용하면서 붕당 정치가 시작된다.

-ko.wikipedia.org- 202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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